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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텍필립 역사와 발전

 

1839년 시계 사업자 파텍과 기술자 필립이 창건

 

세계적인 브랜드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파텍필립(PATEK PHILIPPE)은 폴란드 망명귀족인 앙드와르 드 파텍(Antoine de PATEK)과 프랑스 시계 제조자인 쟝 아드리랑 필립 (Jeas Adrian PHILIPPE)에 의해 1839년 창안된 브랜드다.

150년 전통과 장인 기술이 만드는 파텍필립은 품질의 우수성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열쇠 없는 시계"가 맺어준 파텍과 필립의 만남

 

1821년 앙뜨와르 드 파텍은 폴란드의 한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러시아의 통치에 반발하고 폴란드 반란에 참여하지만 반란은 실패로 끝난다. 스위스로 망명한 파텍은 쥬네브 산맥에서시계 판매를 시작하고 탁월한 사업 능력을 인정받는다. 사업이 번창하던 1839년에 유명 시계 제조자 구쟈베크와 “파텍과 구쟈베크 상회”를 열고 시계 생산과 판매를 전문적으로 시작한다. “파텍과 구쟈베크”는 후 파텍필립사의 모태가 된다.

장 아드리랑 필립은 1815년에 프랑스 로왈지방에서 출생한다. 필립은 우수한 시계 기술자요 발명가였던 부친 옆에서 시계 기술을 습득하며, 다방면의 시계 기술에 전념한다. 1842년 필립은 새로운 시계를 발명하여 시계 기술자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당시 회중시계는 부속품인 열쇠로 일일이 태엽을 감아야 했지만 필립이 만든 “열쇠 없는 시계” (류즈 감기 방식을 탑제한 얇은 형의 포켓시계) 는 시계 자체에 부착된 용두(Crown)를 사용하여 태엽을 감도록 설계되었다. 열쇠 없는 시계는 1844년 파리에서 개최된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는 영예를 갖는다. 또한 박람회에 참석했던 파텍이 열쇠 없는 시계에 관심을 가졌고 이어 필립에게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하게 된다.

파텍필립을 세워 파텍은 사업 확장을 위해 세계를 돌아다니고 필립은 제네바에서 꾸준히 새로운 기술 개발을 해 나감으로써 두 사람의 만남은 여러 가지 걸작을 탄생 시켰다.  

 

 

파텍필립의 발전  

 

이런 창업기를 거쳐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생산의 중심을 손목시계로 이동하여, 이후 기술은 더욱더 닦여져 완성도는 높아만 갔다. 1930년대에 등장한 96타입은 이 시대의 파텍필립 기술의 집대성이다.  

스위스에서도 희귀한 수작 manufacture로서의 존재를 계속해 지금까지 개발해온 정밀시계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뭐라고 해도 파텍필립을 브랜드로써 말하고 있는 것은 미의 감성 밖에 없다. 

1846년에 처음으로 독립분침, 2년 후에는 자동태엽을 개발. 그리고 1851년에는 파텍필립사로 개칭하고 새로운 역사 새기기를 시작한다. 같은 해에 개최되었던 런던 세계 대 박람회에서는 금메달을 수상한 시계를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 왕자가 최초로 파텍 시계를 소유한 사람으로 기록되어있다. 동시에 많은 왕후귀족인 피오9세를 비롯한 여러 명의 로마교황과 러시아의 니콜라스 2세, 차이코프스키, 리하르트 바그너, 록펠러, 아인슈타인 등이 파텍필립의 고객 명단에 올랐다.

 

지나칠 정도로 심플한 파텍필립의 시계는 기술을 위압적으로 고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이얼의 문자, 바늘의 움직임 등 모든 것에 인간 본래의 감동을 느끼게 한다. 그 자세야 말로 시계를 예술까지 승화시켰던 것이다.

 

 

파텍필립은 매우 고전적이지만 때로는 아주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해 새로운 유행을 선도하기도했다. 파텍필립의 제품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칼리버89”다. 창립 150주년을 기념해 나온 칼리버89는 모두1천 7백 28개의 부품으로 구성됐으며, 제작에 총 9년이 걸린 명품이다. 윤년계산 부활절날짜 표시등 33개 기능을 구비하고 있으며, 경매에서 4백 50만 스위스 프랑에 낙찰됐다.

아드리앙 필립의 후손인 헨리스턴의 아들 필립 스턴이 현재 파텍필립을 경영하고 있다.